독서일기(인문)

생각의 지도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2. 11. 11. 12:07

1. 소개

진중권의 <생각의 지도>를 읽었다. 저자는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중이고, 문화비평가, 미학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 관련 논쟁이 붙었을 때, 법원에 대한 기존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의 관점에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비판한 것으로 주목받았다. 이 책은 저자가 <씨네 21>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묶은 것이다. 눈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줕을 쳤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2. 인용 

맥루한은 구술문화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편향을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로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TV를 통해 정치인들의 토론을 방안에서 지켜보다가 전화를 이용해 토론에 참여하지 않은가.

 

리오타르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언어를 착취한다". 즉 매체와 정보기술을 이용해 문장들의 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자본주의는 굳이 체제로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과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의 문장은 전자 데이터 프로세싱과는 애초에 호환성이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 프로세싱은 근본적으로 Yes-No라는 불(Boole) 대수의 이진논리(binary logic)에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과제는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정보'를 전달하는 작업이 아니라, 대중이 사용하는 그 언어를 '반성'하게 하는 데에 있다. 철학의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아니라, 그 문장 속에 구현된 새로운 '언어", 그 언어의 낯섬을 통해 촉발되는 새로운 '사유'다.

 

이진코드의 경쟁력은 복잡한 세상을 단 1비트로 요약해주는 편리함에서 나온다.

 

미디어 이론가 귄터 안더스가 냉소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원본만으로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매체를 통해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우리가 들어 사는 세계가 실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상에 불과하다'. 이 유명한 명제는 흔히 브드리야르의 것으로 여겨진다.

 

귄터 안더스에 따르면 사실(fact)이라는 낱말은 라틴어 factum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만들어진'이라는 뜻이다. 결국 사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은 짧은 경로를 선호한다"

 

복잡한 진실을 남에게 납득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해명의 스토리가 길어질수록 남에게 입증해야 할 사실도 늘어나니까.

 

뭔가를 자처하면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이를 윤리학에선 공약의 부담이라 부른다.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배이데올로기가 무엇보다도 친숙함을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한국에서는 왜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보기가 힘들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 익숙한 풍경 속에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가 들어와 있다. 이 익숙함을 '낯설게' 제시할 때, 관객은 비로소 자신의 무의식을 지배해 온 지배 이데올로기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헤겔의 미학에 따르면,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념(규정)에 가장 장 합치하기 때문이다.....이런 설명의 바탕에는 존재는 생성에 우선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가령 달걀이 병아리가 된다고 할 때, 헤겔이 선호하는 것은 두개의 명사, 즉 달걀과 병아리다. 그가 못 참는 것은 그 둘의 중간, 즉 된다는 동사가 지배하는 구간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실물만한 크기의 지도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제국의 지도 제작자들은 지도라는 가상을 현실과 똑같게 만들기를 원하나, 사실 지도가 지도로서 기능하려면 실물보다 모자란 부분이 있어야 한다. 지도의 효능은 실물보다 떨어지면서도 실물을 대신한다는 경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3. 사족

이 블로그에 정리한 내용은 이 책의 주요 내용이 아닙니다. 단지 이 책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 때 찾기 쉽도록 메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당연하게도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서 읽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이 책의 저자나 이 블로그의 독자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덧붙여 이 블로그는 논쟁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본인은 논쟁을 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치열한 현실공간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가볍게 글을 쓴 것에 불과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도 양해를 구합니다.

 

          2012. 11. 11.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