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오리엔탈리즘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6. 22. 23:16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인탈리즘>을 읽었다. 1999년에 같이 근무하였던 전모 판사에게서 일독을 권유받았으나 이제야 읽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번역자인 박홍규 영남대학교 교수의 해설에 많이 의존하였다. 본문에서 몇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예컨대 밀이 <자유론>과 <대의정치론>에서 인도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문명의 차원에서는 열등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견이 인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 사실도 지식으로서 취급하여야 한다(결국 밀은 일생의 상당 부분을 인도청의 공무원으로 보냈다)

 

퀴네의 정식에 의하면, 동양은 문제를 제기하고 서양은 그것을 해결한다. 곧 아시아는 예언자를 가지며 유럽은 전문가(학자와 과학자)를 갖는다는 것이다.

 

동양에 관한 지식의 체계에서, 동양이란 단순한 장소라기보다는 도리어 하나의 토포스, 곧 인용구의 집합이고 특징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의 문명 주민 여러 지역을 소재로 삼은 해석의 한 학파이다.

 

모든 유럽인은 그가 동양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제국주의자이며, 거의 전면적으로 자민족중심주의자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동양이 논의의 대상인 경우에도 동양은 완전히 부재하며 그 대신 오리엔탈리스트와 그들의 언어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성 빅토르 휴고 <학습론> 중에서)

 

동양적인 정신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신봉하기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의 체계를 구축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맥도널드)

 

맥도널드와 기브와 같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직업에 의식적으로 들어간 인물은, 그러한 결심을 하면서 이미 내린 판단을 기반으로 삼았다. 곧 동양은 동양이고, 이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등의 판단이 그것이다.

 

내가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러 온 허구의 체계가 중대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지적으로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은 오늘날 지구상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깊숙이 중동에 관계하고 있으며, 정책 입안자들에게 조언을 주는 중동의 전문가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오리엔탈리즘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스트는 현재, 동양을 서양의 모방으로 보고자 시도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의 동양은 스스로를 동양화시키는 것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오리엔탈리즘의 결함이 지적인 것임과 동시에 인간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은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지구 위의 한 지역에 대하여 확고한 적대자의 입장을 취하여야 했기 때문에, 인간 경험과 일체화할 수 없고, 인간 경험을 인간 경험으로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려냈던 이슬람의 그림은 단언적인 담론과 보수적인 교리 중 하나가 아니라, 해석의 공동체는 동등한 언어로 서로 의사소통하며 이슬람세계의 내부와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하버드대학교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냉전의 양극체제가 자신이 "문명의 충돌"이라고 칭했던 것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개진했는데, 이 말은 여러 문화들 중에서 서구문화와 유교문화 및 이슬람문화가 그 지지자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주로 다른 문화를 밀어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 물샐 틈 없는 구역과도 같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거의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현대문화이론의 위대한 진보 가운데 하나가 문화란 잡종이고 이질적인 것임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내가 주장한 것처럼 각 문화의 독자성을 어떤 통합되거나 단순한 윤곽으로 무력하게 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와 문명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상호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박홍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지리적 확장과 식민지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민족중심주의와 결부되어 지배의 양식으로 대두한다.

 

서유럽이라는 서양에 비해 아시아라는 동양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곳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고 문화가 있으며 역사가 있다. 그 깊이와 길이는 크기 이상으로 복잡하다. 더욱이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하나의 보편성을 갖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되었다. 이집트를 손에 넣으려는 나폴레옹의 음모를 지원한 오리엔탈리스트의 전문지식이 직접 기능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도구가 된 최초의 보기였다.

 

이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자유도 파기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한 폭력이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문화나 종교는 있을 수 없다(에드워드 사이드)

 

저자의 주장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낯선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점이 눈에 띄였다.

 

    2011. 6. 22.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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