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자유론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6. 9. 22:01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박홍규 교수 번역본)를 읽었다. 지금 읽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이라도 읽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책 소개는 번역자인 박홍규 영남대 교수의 다음 글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자유론은 남북한 대립을 비롯한 수많은 대립적 의견이 상충하는 우리 현실에 그 모든 의견의 평화공존을 위한 최소 조건의 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회의 도덕적 획일성을 유지하려는 법적 강제에 대한 그의 확고한 반대와 그런 시도로부터 시민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현대의 어떤 진보적 사고나 정책보다 앞서 있어서 아나키즘적 자유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본문 중에서 음미해보고 싶은 문장을 고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모든 논의가 직접 지향하는 숭고한 기본 원리는,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빌헬름 폰 훔볼트)

 

우월하는 계급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나라 도덕의 대부분은 그 계급적 이익과 계급적 우월감에서 발생한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사회가 강제와 통제라는 방법으로 개인을 대하는 태도를 절대적으로 규제하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개인적이거나 집단적으로 어떤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라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어떤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타인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경우뿐이다. 그 자신의 행복이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정당화의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개인의 행동 중에 사회의 제재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은, 그것이 타인과 관련되는 경우 뿐이다. 반대로 오로지 자신만 관련된 경우 그의 인격의 독립은 당연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 각자는 주권자다.

 

인간 자유의 세 영역 (1) 의식의 내면적 영역을 포함한다. 가장 넓은 의미의 양심의 자유를 요구한다. (2) 취향과 탐구의 자유를 요구한다. (3) 이러한 개인의 자유로부터, 역시 동일한 한계 내에서 개인들의 단결의 자유를 요구한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이를 표현하는 자유는, 그것이 개인의 행동 중 타인과 관련되는 부분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의 자유 그 자체와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대체로 동일한 이유에 기인하므로 실제로 사상의 자유와 분리할 수 없다.

 

이러한 (3가지) 자유가 없는 사회는 그 통치형태가 어떤 것이든,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유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완전한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을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이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설령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고칠 수 있다.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은 정당했다. 박해란 진리가 통과해야 하는 가혹한 시련으로서, 진리는 항상 그 시련의 통과에 성공한다. 결국 법적 형벌은 유해한 오류에 적용될 때 유익하게 효과를 나타내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무력하다(존슨 박사).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 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만일 그가 반대쪽에서 주장하는 이유를 논박할 수 없다면, 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느 의견을 택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싸움터에 적의 그림자가 없어지면 즉시 가르키는 자는 물론 배우는 자도 모두 전선에 선 채로 잠들어버린다.

 

논쟁자가 범할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최악의 위반은, 반대 의견을 갖는 자에게 악인이나 부도덕자라는 오명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진리와 정의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수 의견자의 독설을 규제하기보다는 다수 의견자의 독설을 제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 누구도 행동이 의견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반대로 의견 자체도 그 표현이 어떤 유해 행동을 적극적으로 선동하는 상황에서는, 자유의 특권을 상실하게 된다.

 

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자유와 생활 상황의 다양성이다.

 

독창성이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 효용을 감지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각 개인의 사적인 일의 결정권은, 정의와 정책에 관한 모든 원칙에 비추어, 스스로 책임을 지는 당사자들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1)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 외의 타인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사회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2) 개인은 타인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만일 사회가 사회적 문책이나 법적 형벌 가운데 하나가 사회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한, 개인은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자유의 원칙은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를 요구할 수 없다(사람이 자신을 노예로 판다는 것은 그의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만일 조직적인 협력과 광범하고 포괄적인 식견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모든 사업 부분이 국가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그리고 국가의 어떤 직장도 예외 없이 가장 유능한 인재로 가득 차 있다면, 순수하게 사색적인 인물을 제외한 국가의 모든 인물, 즉 폭넓은 교양과 많은 경험을 쌓은 지혜의 소유자들은 한군데로 집중되어 방대한 인원의 관료제를 이루게 될 것이다.....그러한 제도 아래에서 재야 민중에겐 실제 경험이 결여되기 때문에, 관료제의 조직방식을 비판하거나 통제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관료제 하에서는 그 이익에 위배되는 어떤 개혁도 실현될 수 없다.

 

모든 것이 관료제를 통해 행해지는 곳에서는 관료제가 진정으로 반대하는 일은 도저히 행해질 수 없다.

 

관료 집단 자신의 능력을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자극은, 관료 집단 못지않은 재능을 갖는 재야 인사의 빈틈없는 비판을 끝없이 받게 하는 것이다.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또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두 가지를 느꼈다. 책의 전부를 읽지 않고 남이 인용하는 일부를 읽을 경우 진의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 1859년 쓴 이 책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일독을 권한다.

 

               2011. 6. 9.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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