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물)

말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5. 9. 20:41

사르트르 자서전 <말>을 읽었다. 저자는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같은 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노벨 문학상 선정에 영향을 끼쳤다. 평소 <탁터 노먼 베쑨>,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이광요 자서전>, <간디 자서전>과 같은 자서전을 즐겨 읽었고, 그 때문에 이 책을 골랐는데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책은 1부 읽기, 2부 쓰기로 되어 있는 점과 유년시절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점이 특이했다. 몇 구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의 서재를 마음대로 배회할 수 있게 된 나는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오늘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제게 자연스런 자리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자리의 높이를 결정해주는 것은 자만심도 가치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시절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곧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환상이 없었던들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그 소유자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반대로 내게는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가를 가리켜 보였다. 나의 존재는 단단하지도 한결같지도 않았다.

 

선남선녀들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믿었다. 종교란 참으로 너그럽게 보이고 편리한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이 새로운 예술이 모든 사람의 것이자 동시에 내 것임을 알았다. 우리는 정신연령이 같았다. 나는 일곱 살이지만 읽을 줄을 알았고, 영화는 열두 살이지만 아직 말할 줄을 몰랐다. 그것은 이제 시작이어서 앞으로 많은 진보를 하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문학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다......구태여 네 뜻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직업을 하나 갖는 것이 좋겠다(할아버지 말)

 

나는 죽음에 관한 흔해 빠진 이야기만을 알아듣고 기억했을 따름이다. 사람은 저마다 살고 죽고 한다. 누가 살고 죽는지는 모른다. 죽기 한 시간 전에도 살아 있다.

 

한 인생에 종지부가 찍히면, 우리는 종말을 가지고 시초를 해석하려고 한다.

 

내 잘못을 이렇듯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일이다.

 

나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저자가 59살에 자서전을 쓴 데서 드러나듯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싶었고, 뭔가 변화를 모색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2011. 5. 9.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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