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너와 나의 사회과학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4. 14. 19:56

우석훈 <너의 나의 사회과학>을 읽었다. 저자는 <88만 원 세대>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태경제학자다. 이 책에는 우리 삶과 세상을 읽기 위한 사회과학 방법론 강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기 말로 학문을 하는 풍토에서 비로소 세계적인 이론이 나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준다.

 

이제는 소통을 넘어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소위 클러스터 현상 같은 게 이런 연구에서 중요해지죠. 착한 행위자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 자신도 그런 전략을 사용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유리할 수 있고, 반대로 이기적인 행위자들 사이에 둘러 싸여 있으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맞대응 전략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개개인의 품성으로 환원시키면, 결국은 획일적 도덕주의 외에는 도달할 곳이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이런 품성론에 갇히면 토론이나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성의 오류에 대한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레이몽 부동식으로는 '사악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죠. 모든 사람이 착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시스템이 착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을 바꾸기보다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죠. 사람 자체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 지식을 전달해서 스스로 똑똑해지도록 만드는 것, 이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렇듯 생태계에는 전략 개념이 있을 뿐 선악 개념은 없습니다. 더 잘 적응했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성패가 구분되는 전략만 있는 셈이죠. 선악은 인간이 만든 가치관일 뿐입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통해서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기보다는 집단적으로 함께 똑똑해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똑똑해지기 혹은 집단지식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시도가 한국에서는 이제껏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보다 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얕지만 넓게 알면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 한국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기획자라고 부릅니다. 기획자란 자기가 다 알 필요는 없지만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 그렇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푸코나 데리다의 책도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책은 바로 이렇게 현실과 부딪히고 싸워서 이긴 사람들의 책이 아닐까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고 어떻게 시대를 바꿨는지 책을 통해 배울 수 있고 또 우리의 경우를 고민할 수 있으니까요

 

구조주의는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설득력이 높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를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과학은 스스로의 예측이 반증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게 칼 포퍼의 주장입니다. 이제 과학은 입증을 통해서 자신의 제국을 세워나가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일 뿐인 임시적인 가설로 그 위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딜타이의 해석학은 예측 중심의 과학과는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형태의 접근을 과학철학의 사전적 접근과 비교하여 사후적 접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측에 대한 강조를 설명이라고 불렀던 것에 비해서, 이 방식은 이해라고 부르죠......저자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썼으며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가 중요해지죠.

 

텍스트의 힘은 바로 콘텍스트의 힘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디오를 들으면서 우리는 마음 속에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바로 일종의 콘텍스트입니다.

 

일원론은 아주 강력한 환원주의를 띠게 됩니다. 한 가지 요소로 환원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죠

 

사회과학의 세상에서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상 되는 사회 그 자체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김예슬 선언이 나오면서 사유하는 주체 혹은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대학생이 적어도 한 명은 생겼기 때문에 대학생을 모델링할 때 주체의 성격을 달리할 필요가 생긴 거죠......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바퀴벌레 모델'이라고 부릅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보이면 집 안에는 이미 수만 마리가 숨어 있다는 거잖아요?

 

남북과 같이 나눌만한 게 있을 때는 일종의 나눠 먹기 게임이 되는데 이제 더 이상 나눌 게 없으니 더 무식한 쪽이 이기는 치킨 게임이 되는 거죠

 

더 좋은 기술이 있어도 예전 기술에 일단 잠겨버리면 최적 기술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게 '잠김 현상'이라는 가설이 주었던 충격이었습니다......소니가 베타방식의 비디오테이프를 상품화했지만 이것 역시 마찬가지 문제로 시장에서 실패했습니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관용성이 큰 몫을 차지했다는 것이 리처드 플로리다의 주장입니다<창조계급의 부상> 그래서 게이지수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관용성을 측정하는 지수라고 할 수 있는데 게이지수가 높은 도시가 결국 창의성 혹은 창의력이 높은 도시라는 거죠.

 

이 책을 읽고 나니 1980년대의 그 많던 사회과학 서적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2011. 4. 14.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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