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4. 11. 18:44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니코마코스가 편집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 따르면 윤리학은 정치학과 함께 실천적 학문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표가 행복이며 이 행복이 도덕적 활동에 의해 달성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의 윤리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삶의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향락적 삶, 정치적 삶 그리고 관조적 삶이 그것이다.

 

우리는 옳은 행위를 함으로써 옳게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있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

 

건강이나 체력의 경우에 목격할 수 있듯이, 윤리적 특성은 본질적으로 부족함이나 지나침으로 인해 파괴된다.

 

덕과 정치학의 모든 관심사는 쾌락과 고통이다. 쾌락과 고통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것이고, 이것들을 잘못 처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

 

중용은 두 악덕, 지나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악덕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악덕 사이에 있다.

 

용기는 두려움이나 태연함의 중용이다.

 

중용을 잘 택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하나의 차선책으로서 악 가운데 가장 적은 것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부러진 막대기를 곧게 할 때 하듯이, 우리는 과오로부터 멀리 물러남으로써 중간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유쾌함이나 쾌락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란 사람들에게 기꺼이 옳은 일을 하도록 인도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며 옳은 일을 원하게 하는 품성이다.

 

정의란 합법적인 것과 공정한 것이며, 부정의는 불법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비아스가 지배자의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인품이 드러난다고 한 말은 옳다. 지배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사회의 일원이 되기 때문이다.

 

정의란 일종의 비례이다. 비례는 비율의 평등성이며(분배적 정의)...../선의 지나침과 악의 모자람을 얻는 것이 이득이 되고 이와 반대로 선의 모자람과 악의 지나침을 얻는 것이 손실이다. 이 둘 사이의 중간을 균등이라고 하는 것이다.......시정적 정의는 이득과 손실의 중간인 것일 수밖에 없다.

 

합법적 정의는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구별하는 데 있다.

 

행위의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발성이다.....자발적 행위는 우리가 우리 능력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을 알고 수행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평한 것은 정당하나 법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법적 정의의 시정이라는 점이다. 모든 법은 보편적인데 어떤 일에 대해서는 보편적 규정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서는 정의가 필요하지 않지만 정의로운 사람들 사이에는 우정이 필요하다.

 

완벽한 우정은 선한 사람들의 우정이며, 덕에서 서로 닮은 사람들의 우정이다.

 

우정에는 이렇듯 여러 가지 종류가 있기에 나쁜 사람들은 쾌락이나 유용성 때문에 친구가 되지만, 선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 때문에 즉 그들이 선한 사람이기에 친구가 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을 더 사랑한다.....잘 대접받는 일에는 수고가 따르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일은 수고롭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는 것이며 어머니는 자식이 자기 자신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되도록 많은 친구를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 좋고, 함께 지내기에 알맞은 수의 친구를 가지는 것이 좋다.

 

우정의 본질은 함께 사는 것이다.

 

몇번 더 읽어봐야 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2011. 4. 11. 진주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