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성찰)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8. 13. 19:31

김두식 교수가 쓴 <불편해도 괜찮아>을 읽었다. 김두식 교수가 쓴 <헌법의 풍경>, <불멸의 신성가족>을 읽고 그의 문제의식, 그의 글쓰기에 공감과 감동을 느낀 바 있어 주저없이 이 책을 골랐다.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교수의 길로 들어섰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영화보다 재미 있는 인권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드라마와 영화를 소재로 인권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권분야는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검열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의 문제, 차별의 종착역 제노사이드인데, 어느 하나 가볍게 다룰 수는 없는 주제다. 나는 청소년 인권에 관한 저자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였다.

 

음미해봤으면 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통제는 학생들에 대한 철저한 불신에 기초한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성적 지향이 교육으로 만들어지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산 증거란 이야기입니다'(하비 밀크)  /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흑인, 여성, 장애인 같은 전통적인 차별대상그룹과 구별됩니다. 본인이 커밍아웃을 하기 전에는 누가 동성애자인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공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 공포 때문에 더 커진 적대감이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친구가 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지요.

 

영화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메씨지를 전합니다.

 

인권감수성은 한마디로 '불편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기자들이 "그냥 오락영화인데, 뭐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며 근육질의 남성미를 찬양하고 있을 때, 김소민 기자는 이 영화('300'에서 심한 불편감을 느꼈고, 그 불편함의 정체가 "인종주의, 여성과 장애인 차별"에 기인한다고 설명해냈습니다.

 

잔혹하게 상대방을 죽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예컨대 짐승이나 괴물로 '비인간화'하는 것입니다.

 

192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적 장애 여성에 대한 단종시술이 합헌이라고 판결합니다. /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관해서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함으로써 세계 모든 헌법학도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한 올리버 웬들 홈즈 대법관, 바로 그 사람이 판결문을 썼습니다.

 

장애를 질병으로 보는 관점은 장애인을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한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 장애는 치료가 필요한 게 아니라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임을 켐프는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 장애에 대한 각종 편견에 맞서 켐프가 쟁취하려고 했던 것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정상이라는 인식이었습니다.

 

개인에게 보복을 맡겨두면 한두배가 아니라 열배, 스무배의 복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同害報復의 딸리오법이 만들어졌고, 그 형벌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집행하라고 시민들은 국가에 역할을 위임했습니다.

 

영화등급을 매기는 MAPP가 보여주는 이같은 편견은......많은 사람들이 하면 정상이고, 소수의 사람들이 하면 비정상이라는 것이지요.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애티커스 펀치가 딸에게 주는 가르침의 핵심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남에게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선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얼마나 세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는지, 글을 쉽게 쓰려고 하는지, 주제에 대한 연구를 철저하게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인권이란 보편적 성격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20세기의 잣대로 21세기의 인권을 논해서는 아니 된다.

이 책이 주장하는 일부 내용, 예를 들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그런 것까지 인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우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이 아니므로, 국가안보와 병역의무의 형평성만을 내세워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박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일독을 권한다. 특히 자신이 보수적이고 이 사회의 주류라고 생각하시는 분부터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한다. 사회통합이라는 것은 결국 다수자가 소수자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2010. 8. 13.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