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8. 6. 20:54

김선주씨가 쓴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었다. 하은정 변호사가 트위터에서 읽어볼 것을 추천한 책이다.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자유언론투쟁선언과 관련되어 해직되었고, 한겨레신문 창간때 여론매체부원으로 시작하여 문화부장, 출판본부장, 논설주간을 거치고 퇴직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칼럼이나 논설로 썼던 글을 추려 정리한 것이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정혜신은 말했다. 잘 듣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상투적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 교장 샘(김선주)이 그 산모델이다(서명숙 추천글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정의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글은 사람이다'라는 우리식 격언으로 의역될 수 있다면 언론인 김선주의 글은 그 으뜸가는 사례에 속한다......김선주는 "나에게 세상 사람 모두가 특출하고 특별하고 특이한 존재이며 아무도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그의 글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부끄러움'이다(정혜신 추천글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다. 개개인의 인간을 독립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기 이렵다"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배고픈 이웃에게 밥 한 그릇을 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봉사하기 위해 일부러 캘커타에 오지 마십시오. 같은 말,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에게 우선 말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캘커타에 오십시오(테레사 수녀).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까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이광웅 시인 '목숨을 걸고')

 

주님이시여 제가 저 자신을 알려면 당신이 제 안에 고통의 닻을 내려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당신이 줄이 잡아당기면 저는 눈을 뜹니다.

 

국내 어떤 방송사가 티베트의 가난한 마을을 취재했다. 불가사의한 것은 그들이 그처럼 가난한데 행복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항상 기도하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적대적인 세력은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면 간단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아왔다.

 

쓰라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차이'에 대한 두려움이 끔직한 테러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노력한다면 모든 차이를 초월하는 기본적인 공통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교황 바오로 2세).

 

인류는 서로 공존하지 않는 한 공멸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공존을 위해서는 나누는 수밖에 없다. 나누지 않는 곳에 정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이 없으면 정신적 독립도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진정으로 사회의 모순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가 차별적 상황에 처했을 때만 가능하다. 여성운동도 사회적 편견과 싸우는 목마른 여성들이 뭉쳤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별의 고통을 과거에 진정으로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꾸어낸 것이다.......우리는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서먹서먹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주춤주춤 다가간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 인생에서 많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랑의 순간들을 잿빛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별을 맞아야 하고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랑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고 또한 이별의 예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노엄 촘스키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잘 양립시키려면 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고 부와 행복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특정 판사와 특정 판례를 비판하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해치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다.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사법부의 본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가장 먼저 울기 시작해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소통이 필요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 윗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래의 정서가 위로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듣기보다는 말하기 좋아하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그들의 부모보다 그들의 시대를 닮는다(신학상 선생)(신영복 교수 아버지)

 

글을 쓰면서 지켜온 원칙이 있다. 나의 일상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이 아니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을 억압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저자 후기 중에서)

 

삶이 곧 글이었고 글이 곧 삶이었다는 김선주 선생의 세상이야기다. 그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녀의 삶을 닮고 싶다는 증거다. 일독을 권한다.

 

            2010. 8. 6.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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