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김경동 외 13인의 <인문학 콘서트>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1. 13. 11:27

김경동 교수 외 13인이 한국정책방송 KTV에서 사회자 김갑수님과 인문학 열전이라는 제목으로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대담에 참여한 사람은 김경동, 김기현, 최재천, 김광웅, 문용린, 정진홍, 황경식, 고미숙, 김효은, 장회익, 차윤정, 도정일, 박정자, 김영한님이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 윌슨 선생님이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라는 책에서 설명하셨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이론과 지식을 한데 묶어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현상을 지칭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없는 거예요. 어느 공개석상에서 통섭이라는 말을 제가 만들었다고 자랑한 적이 있는데......원효대사님이 화엄사상, 화쟁사상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쓰는 말이더라고요.......통섭은 그냥 거기 섞여 있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로 멈춘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어떤 함칩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문제로 남아 있는 것들에 통섭이 필요하다고, 거의 단언합니다. 간단한 문제들에 대한 프로토콜은 이미 우리가 다 가지고 있어요. 답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씨름해야 할 것들은 모두 복잡계 수준의 문제예요.

 

찰스 스노경은 인문학의 흐름과 자연과학의 흐름이 결코 만날 수 없는 거대한 두 주류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스스로 장벽을 허물라고 주문하셨는데, 이걸 무엇이 허물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저는 생물학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물리학이나 화학은 기본적으로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부분을 보고 이해하는 학문입니다......그 쪼갰던 걸 다시 끼워 맞춰야 온전한 하나의 생명체를 볼 수 있고, 그 생명체들이 모여 사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거기에서 생명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기에 생물학은 분석과 종합이 늘 함께해야 하는 학문이거든요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진화의 다른 말은 한마디로 다양화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진화는 그렇다.        (최재천 대담분)

 

GPI개념은 미국 미시간대 로널드 잉글 하트 교수가 주창했는데, 국민소득에 비례해서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혔습니다.

 

자아실현이나 삶의 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만큼 남의 삶이나 생각도 존중해야지요....다시 말해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생활영역에 투자하는 거지요......이제 중요한 것은 이제 물질과 에너지만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자각이 생긴 겁니다. 제러미 리프킨도 사람들의 재산 소유에 대한 관념이 영구 소유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빌리는 형태, 즉 시산이라는 개념으로 옮겨 가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디슨도 인간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자산이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김광웅 대담분)

 

오늘날 우리 교육은 앎과 삶을 구분하고, 앎에 너무 지우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가드너 교수의 다중지능이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육은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문용린 대담분)

 

기본적으로 종교 언어는 설명의 언어가 아닙니다.....내가 느끼고 의미를 부여한 경험을 고백하는 언어입니다.

 

앎은 우리에게 정직한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삶을 감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둘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정진홍 대담분)

 

도덕적으로 '의무 이상의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담은 새로운 윤리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의무 윤리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덕의 윤리가 되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공맹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의지를 연마하고 단련해서 강화하는 것입니다. 의지력을 강화해서 도덕적인 용기, 다시 말해 덕을 함양하는 것이 윤리학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되었죠.

 

윤리적 실천에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우선,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적인 각성이 요구되고(지), 그 다음에 그것을 꿋꿋하고 당당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의지력이 요구되고(의), 마지막으로 그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감정 상태가 중요합니다(정). 

                                                                                  (황경식 대담분)

 

이렇게 삶이 통째로 소통되고 서로 교감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스피노자의 말이 있군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

고전을 보면 능력은 존재가 삶과 맺는 관계에서 나오거든요. 스피노자의 말뜻도 그런 뜻이고요.                                                                       (고미숙 대담분)

 

우리는 처음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먼저 범주로서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흑인이다, 백인이다, 키가 작다, 크다               (김효은 대담분)

 

애초에 생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나올 때 가장 큰 위험이 바로 건조되는 것이었는데, 이끼가 물을 품어서 땅을 축축하게 해주니까, 그 안에서 여러 생물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

 

무엇보다도 이 오래된 숲의 특징 중 하나가 고요하고 정제된 공간이라는 점이에요.

 

제한된 개체로 길게 살거나 많은 개체가 짧은 주기로 삶을 이어가거나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있으니 성공한 셈이지요.

 

가령 헨리 데이빗 소로 같은 분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서 문명에 대해 성찰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의 납부를 거절한 죄로 투옥당했으며, 그 때 경험을 기초로 쓴 '시민 불복종'은 후에 간디의 운동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절대적인 강자, 절대적인 약자가 없이 모든 생명이 늘 공존하는 곳이 바로 숲인데, 사람은 숲에 있는 미물보다 못하다는 거에요.          (차윤정 대담분)

 

문화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회는 인문적 소양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지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우리가 예상하고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거대한 감시와 통제 체제입니다.

 

왜 옛날 책을 읽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답변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달라져도, 인간에게는 바뀌지 않는 경험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언제 어디서 살든 유한성의 경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길가메시 왕은 죽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친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며 묻습니다. 오 친구여 나도 너처럼 죽어서 영원히 일어설 수 없단 말인가....이러한 유한성의 경험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도정일 대담분)

 

후설은 우리 의식의 지향성을 이야기했지요.....우리의 의식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상태, 그저 투명한 상태에 있는데, 일단 그 앞에 무언가가 나타나면 그때부터 그리고 향하는 지향성이 있다는 거지요. 대상으로 향해서 그 대상을 의식하는, 그런 작용을 한다는 거지요.

 

인간을 사물화하는 시선이 바로 불편함, 공포감의 원천이군요.

 

그런 점에서 인간 사이의 만남은 내가 그 사람의 대상이 되느냐, 내가 그 사람을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그런 치열한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판옵티콘은...... 간수는 죄수를 훤히 보고 있는데 죄수는 간수를 전혀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시선의 비대칭성이 극대화된 건축구조입니다.

 

공개적인 고문이나 처형이 민중에게 위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저항과 폭동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권력은 전략을 완전히 수정합니다. 이제부터는 죄인을 감옥에 가두고 교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죠.

 

사실 어둠은 우리를 감춰줘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만, 강렬하고 밝은 빛은 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푸코는 빛은 권력이고, 어둠은 피지배자의 영역이라고 말했던 거지요.

 

홉스는 <리바이어든>에서 절대군주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이 전염병을 관리하는 모델은 나병의 경우와 아주 달랐습니다. 환자들을 성밖으로 추방하는 게 아니라 모두 집 안에 있게 했습니다......완벽하게 통제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 식의 통제를 하면서 모든 인민을 전부 함께 끌어모으는, 그런 모델을 만들어 낸 겁니다.

 

철저한 감시체제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제가 아주 소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인문학적인 소양에 그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인간에 대한 신뢰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정자 대담분)

 

유토피아를 버려라, 그것은 개방사회의 적이다,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없다,

실현될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추구하면

결국은 전체주의와 폭력만을 자초할 뿐이다(칼 포퍼)

 

토마스 모어가 평등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베이컨은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초첨을 맞췄던 것입니다.

 

과학기술이 야기한 문제점을 제거할 수 있는 한 단계 더 높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해결책은 인간에게 달렸습니다.....다시 인문학으로 돌아옵니다. 유토피아와 인문주의, 과학기술과 인간의 윤리 도덕이 서로 조화될 수 있을 때 탈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립하는 두 가치를 넘어서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박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이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프랑스 학자 자크 아탈리 같은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문적 상상력과 과학의 힘, 이것은 현대문명을 창조한 두 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한 대담분)

 

묻고 대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주제의 강조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인문학자와 주제를 만날 수 있고, 그들이 인용하는 책을 소개받을 수 있어 좋다. 일독을 권한다.

 

         2010. 1. 13.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