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9. 11. 22. 15:30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를 읽었다.저자는 프랑스에서 1926년 태어나 철학, 심리학, 정신병리학을 연구하여 1984년 사망할 때까지 꼴레쥬드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이 책은 권력이 인간과 신체를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기술한 책이다. 근대적 감옥과 사법제도는 범법자들을 교화시키고 그들을 선량한 시민으로 변화시키기는 커녕 새로운 범죄자들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고, 권력은 이것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과거에는 위험한 범죄자를 단순히 격리시키는 것에 불과했던 감금은 수감자에 대한 절대적 권력의 감시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징벌의 체계가 유럽과 미국에서 재편성되던 시대에 여러 가지 변화 중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한 가지 점은 신체형의 소멸이다......형벌에 의한 억압의 중요한 대상으로서의 신체는 소멸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근대 형벌제도에서 징벌과 신체의 관련이 과거의 신체형의 경우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근대적 제도에서 신체는 도구 또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 된다.

 

신체에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처벌 뒤에 이어지게 된 것은 마음, 사고, 의지, 성향 등에 대해서 깊숙이 작용해야 할 징벌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징벌은 신체보다는 정신에 가해져야 한다(마블리).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권력은 어떠한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고, 또한 어떤 지식의 영역과의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국왕의 신체) 반대의 극점에 사형수의 신체를 놓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체도 역시 법률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의식을 행하게 하고, 모든 이론적인 담론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군주인 인간에게 할당된 '최대한의 권력'에 근거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벌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표시되는 '최소한의 권력'을 체계화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 어느 정도 중요한 모든 형벌은 그 자체로 신체형적 요소를 유지하여야만 했다.......죄인이 고통을 받아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사법의 수치스러운 측면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사법의 의식 그 자체이다. 

 

이러한 소송절차의 비공개적이고 문서중심으로 된 형식은 범죄사건에서 진실을 확증하는 것이 바로 군주와 그의 재판관들에게는 절대권과 독점권이었다는 원리와 통하는 것이다.

 

문서 본위이고 비밀유지를 취지로 삼는......형법상의 증거조사는 피고인 없이 진실을 생산할 수 있는 장치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소송 절차는, 엄격한 권리로서 자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도 필연적으로 자백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근거로 삼아 우리는 그 시대의 고문의 기능을 진실에 대한 신체형으로 재확인할 수 있다.

 

이 잔인성이야말로 징벌을 백일하에 거창한 모습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신체형이라는 형태로 전환시키기 될 범죄의 몫이다......신체형에 따라 다니는 잔인성은 이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그것은 형벌과 범죄를 연결짓는 원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에 대한 징벌의 분노를 의미한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범죄자 속에 발견되는 이 인간이 바로 형벌 결정의 표적이 되고, 교정하고 변화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일련의 기묘한 학문과 현실의 영역이 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재판관은 피고와 사회 사이에 있는 올바른 중재자가 되어야 하고, 법은 아주 명확히 규정되고, 확실하고, 항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르 트론느)

 

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야말로 법의 장치를 가장 취약한 것으로 만든다.

 

예전에 제재로서의 낙인이 신체형을 구성햇듯이, 이제는 장애로서의 기호가 형벌의 새로운 장치를 구성해야 한다.

 

제도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형식을 통해 범죄의 내용을 재현하는 이런 형벌에 관한 모든 장치를 개혁자들은 제시했다. 예를 들면 베르메이유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공적인 자유를 남용하는 자는 그 개인의 자유를 박탁해야하고, 법의 혜택과 공직의 특권을 남용하는 자는 그 시민권을 빼앗아야 할 것이며, 또한 독직이나 고리대금에 대해서는 벌과금을 부여하는 처벌을 해야 한다.

 

감옥의 출현과 더불어 생긴 것은 처벌하는 권력의 제도화이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감시는 생산도구에 내재해 있는 부품인 동시에, 규율과 징계의 권력 안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톱나바퀴인 한 경제의 결정적인 작용요소가 된다.

 

규율 중심적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규칙 위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행위이다. 기준미달이라는 막연한 내용도 처벌할 수 있는 사항이 된다.

 

시험은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이다.

 

나병이 추방의 의식들을 만들어 낸 것이 사실이라면, 페스트는 규율의 도식을 탄생시켰다.....나병이 낙인찍히는 것이라면 페스트는 분석되고 배치되는 것이다.

 

일망 감시시설에서 죄수는 보여지긴 해도 볼 수는 없다. 그는 정보의 대상이 되긴 해도, 정보 소통의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벤담은 권력이 가시적이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가시적이란, 감금된 자의 눈 앞에 자신을 살펴보고 있는 중앙탑의 높은 형체가 항상 어른거린다는 뜻이다.

 

감옥의 명백한 논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의 박탈이라는 단순한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자유의 상실은 모든 이에게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벌금보다 더 나은 평등주의적 징벌이다.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면 수형자는 반성한다. 자신의 범죄와 대면하여 혼자 있게 되면 그는 그것에 대한 증오를 배운다".

 

정당한 형기는 범행과 그것의 정상에 의해서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그대로의 형벌 자체에 따라서도 변해야 한다.

 

악인을 교정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교정이 일단 이루어지면, 죄인은 사회로 되돌아가야 한다(Ch. Lucas)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범죄는 흑인해방의 경우처럼, 때에 따라서는 우리 사회의 해방을 위해서도 소중한 정치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흑인해방이 범죄 없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처벌의 권력은 그 자체의 기능상 본질적으로 치료하거나 교육하는 권력과 다르지 않다.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이 점이 우선 당혹스럽다. 조금 이해한 내용도 법률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이 점은 더욱 당혹스럽다. 참고 이해를 계속 넓혀가다 보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은 몰라도 방향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2009. 11. 22.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