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성찰)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으니

자작나무의숲 2009. 4. 3. 21:11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었다. 저자는 재일교포 2세로서 1998년 일본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은 한국 국적자로는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로 되었고, 일본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나쓰메 소세키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두 사람을 들어, 감정기복이 심했던 저자의 청춘을 수놓은 우뚝 솟은 위대한 존재라고 평가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며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임을 그들로부터 배웠다고 고백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대라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세계화일 것이다......한편 세계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현대의 특징으로 자유의 확대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품고 있던 생각은 문명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멋진 것이 아니며,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고독은 깊어지고 구원받기 어렵다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서양 근대 문명의 근본원리를 합리화로 보고, 그것을 통해 인간 사회가 해체되고 개인이 등장해서 가치관과 지식의 모습이 분화해가는 과정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과학과 합리적 사고에 의해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연결해주던 것들이 난센스로 간주되면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막스 베버는 이것을 탈악마화라고 불렀습니다. 그 결과 '우리'였던 것들이 하나씩 분리되어 '나'라는 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 한 이른바 개인주의의 시대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카를 야스퍼스)

 

자기의 성만을 만들려고 하면 자기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하여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타자와 연결되고 싶고 제대로 인정을 받고 싶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마음'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매우 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진지함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불공정한 경쟁과 가혹한 부의 편중이 생겼습니다.

 

알고 있다와 사고하다는 다릅니다. 정보와 지성은 같지 않습니다.

 

악마는 늙은이다. 따라서 늙은이가 되지 않으면 악마의 말을 알 수 없어(파우스트)

 

톨스토이의 주제는 철저하게 反과학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이른바 '삼비판'의 저작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조화를 이루며 묘사되어 있습니다.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일을 한다는 행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타자로부터의 배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 말하겠습니다.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자유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정신의학자이며 사상가인 빅터 E. 프랭클은 사람들이 고뇌에 견디는 힘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의미 상실에는 견디지 못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무한히 진화해가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무의미하다. 죽음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 또한 무의미하다(톨스토이).

 

프랭클이 말한 것과 비슷하지만 자기의 의미를 확신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공포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의 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처럼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어도 죽음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두렵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나며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자라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2009. 4. 3.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