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기타)

서경식, 김상봉 대담 '만남'을 읽으니

자작나무의숲 2008. 12. 21. 13:49

서경식, 김상봉의 대담 '만남'을 읽었다. 서경식님은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났고, 현재 도쿄케이자이 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로 와 있다. 이른바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던 서승, 서준식의 동생이기도 한데, 이 블로그에서도 그가 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소개한 바 있다.

 

김상봉님은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칸트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벌없는 사회'를 만들어 반학벌운도을 전개한 바 있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책은 서경식, 김상봉이 만나서 우리에게 5 18은 무엇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기억력과 망각증, 교양, 예술이라는 다양한 주제로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너 나 없이 민주주의에 시큰둥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싸워야만 할 현실이 존재하는 이상, 지금 싸움을 그만두어야 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예컨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때 시장 바닥에 앉아서 번역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민중성을 이야기한 겁니다.

 

언어는 단초일 뿐이고 결국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겠지요.

 

공동의 고통, 가능하다면 공동의 투쟁, 그런 것들이 '우리'를 생성하는 것이지 '우리'라는 무언가가 먼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에요.

 

제 생각에, 삶의 한정성, 임시성과 같은 것은, 거기에 만약 장벽의 외부가 있다면, 견딜 수 있어요.

 

한국 민중신학에 대한 저의 비판은 바로 이러한 민중과 지식인(신학자) 사이의 거리를 잊어버렸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고난받는 민중이나 씨알(아래알) 자신인 양 착각하고 안일한 동일시를 하는 순간, 민중 담론은 타락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5 18이 단순한 항쟁이 아니라 씨알의 나라와 현존하는 국가기구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누구도 일방적으로 사물화 또는 도구화되지 않고 서로주체가 되는 그런 공동체, 만남을 가리켜 저는 서로주체성이라 부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권력은 지배이고 지배는 기술이며 기술은 보살핌이에요. 모든 지배는 보살핌의 기술이라는 겁니다.

 

근대국가는 노예를 외부에 둡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노예를 외부에 둘 능력이 없으니까 노예를 내부에 둡니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이 고통을 재현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성의 숭고를 보여주는 한에서만 그 고통이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실러)

 

진정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서양의 철학과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자기완성과 자기실현이지 타자와의 만남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사르트르)

 

87년 체제가 군사정권을 끝장낸 뒤에 군사정권이 있던 자리를 오늘날 대기업 집단과 자본이 차지한다는 주장은 옳은 말이에요.

 

일본 지식인들은 '자발적 노예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제가 사사한 후지타 쇼조  선생님은 '안락전체주의'라고 말했습니다. 안락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런 전체주의가 1970년대에 진행되었다고 하셨어요.

 

지위 상승이나 실용적 목표를 지니지 않은 앎, 실험실적이지 않은 앎, 그러나 살아남기 위한 힘이 되어주는 앎, 저는 그런 것이 교양이라고 보는데, 크게 보아 그것은 예술과도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유의 주체성 혹은 계몽을 위해 중요한 요소가 용기(칸트)

 

참된 교양이란 삶을 전체로서 이해하되, 모든 것을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보편적, 총체적 만남의 지평을 더불어 넓혀가는 마음의 소질과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리주의적 세계관이란 겉보기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표방하지만 실은 거기에서 최대다수라는 것은 허구일 뿐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타자를 배려하고 연대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 모든 공공적 이익의 표상은 결국 사회를 지배하는 강자에 의해 전유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타적으로 살아라' '가난한 자를 도와라' 하는 것이 국가 차원에서는 가장 야비한 방식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겁니다. 인류가 이 도덕적인 자기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참된 의미의 도덕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은 시민이 되는 것과 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양랍하기 어려운 두 개의 덕이다(루소)

 

함석헌은 역사라는 것은 인류가 신을 찾아서 자신을 구원해가는 과정, 도야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는데요

 

사르트르가 '유대인'이라는 소책자에서 말한 것처럼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만든다고 한 것이 그렇고, 프란츠 파농이 프랑스에서 가서 백인들과 만나면서 흑인이라는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 것도 그런 거지요.

 

자기의 현존이라는 건 끊임없는 타자성으로의 이행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인거죠.

 

우리 사회가 엉망진창이기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종교의 다원성'입니다.

 

다카하시 데쓰야나 서경식이 정의를 대변하고 정의를 강요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울면서 정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거기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불문율인 이 땅에서 죄는 언제나 가난한 자의 멍에이고 인권은 그들을 위한 복음이다. 부자는 돈이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은 국가도 법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음을 끝까지 고집하면 현명한 자가 된다(블레이크)

 

참된 철학은 경탄이 아니라 경악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직면한 고통과 슬픔에 대해 경악하고 절망하면서 '왜?'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이야말로 올바르게 놓인 근거물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고통이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통은 영혼을 부패시킨다. 고생이 인간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매개될 때, 그때 고통은 우리를 넓고 깊게 한다.  

 

여러 가지 점에서 구별되는 두 사람이 동일한 주제를 놓고 대담을 벌이는 과정이 한편으로는 흥미로움을, 한편으로는 답답함을 준다. 현대사의 여러 쟁점을 내부, 외부라는 상이한 시각에서 벌이는 논쟁은 생각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 일독을 권한다.

 

                      2008. 12. 21. 부산에서 자작나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