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니

자작나무의숲 2008. 12. 12. 22:19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작가는 포르투갈 사람으로서 1998년 '수도원의 비망록'이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47년 죄악의 땅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후 19년간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고 공산당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 책은 차를 몰고 가던 어떤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게 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곧이어 그와 접촉한 안과의사, 아내, 간호사, 병원 환자 등이 눈이 멀고, 이 질병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고, 정부는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이들을 정신병원시설에 수용하여 일반인과 격리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수용소에서는 강간, 살인, 협박과 범죄,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바치고 아무데서나 배설을 하는 타락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이 광경은 눈이 멀지 않은 단 사람 즉 의사 아내에 의하여 생생하게 목격된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의사 아내 일행이 의사 부부의 집으로 가고, 눈이 가장 먼저 먼사람부터 시작하여 색안경을 썼던 여자, 의사 순으로 시력을 회복하는 반면, 이제껏 홀로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 아내가 눈이 머는 상황이 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반은 무관심으로, 반은 악의로.

 

첫 번째가 먹을 것이요, 그 다음이 조직이다. 둘 다 사는 데는 불가결한 것이다.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사람 몸에서 그래도 영혼이 남아 있는 곳이면 있다면 그게 바로 눈일 거야. 

 

오래 전에 눈이 먼 사람은 방금 눈이 먼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는 그의 몸무게만큼의 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존엄성이란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인생이 모든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수도사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왕의 홀을 쥐었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새 세상은 어떤 모습이오......안과 밖, 여기와 저기, 다수와 소수, 우리가 겪고 있는 일과 앞으로 겪어야 할 일 사이에 차이가 없어요.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부정한 방법으로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해 피해자가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다면 정의도 있을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고.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생각을 바꾸는 데는 진짜 희망만큼 도움이 되는 게 없죠.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환상적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는 작가의 글 속에서 때로는 섬찟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을, 때로는 심오한 인간 내면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동시대인에게, 실명과 침묵이라는 장치를 통해 무책임한 윤리의식, 붕괴된 가치관, 폭력이 만연한 현대사회를 암시하는 작가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일독을 권한다.

 

               2008. 12. 12.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