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7. 8. 4. 21:47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그의 문체를 사랑하게 되었고, '강산무진', '현의 노래'를 연거푸 읽으면서 그의 문체에 중독되었다.

'남한산성'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책은 인조가 청의 침입을 받고 난리를 피하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항복하러 성을 나올 때까지  남한산성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축은, 끝까지 싸우는 길만이 살 길이라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主戰論者, 성을 나가 청나라와 화친을 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이조판서 최명길을 중심으로 한 主和論者, 주전론자가 무엇인지, 주화론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조정이 나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을텐데 걱정하는 서날쇠를 중심으로 한 성내 백성들, 이렇게 세가지다.

 

그러나 작가는 주전론도 주화론도 말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고, 김상헌도 최명길도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백성들을 단일한 대오로 조직하지 못하고 반상의 도를 강조하는 조정의 무능력과 고루함, 전쟁이 길어질수록 피폐해져가는 백성들의 삶을, 건조하면서도 풍부한 문체로 그려낸다.   

 

소설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이 떠올랐다. 즉, 중국의 지배자가 明나라에서 淸나라로 넘어갔음에도, 권력의 이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권력의 이동을 알지만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묶여 중립외교를 파기한 인조의 한계가 병자호란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권력이동을 간파하고 명과 청 사이에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광해군,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정을 일으켜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받듬으로써 병자호란을 자초하는 인조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和, 戰, 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김상헌의 대사).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최명길의 대사)

 

戰이 和를 이끌어 내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옵니다(김상헌의 대사).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주시옵소서(최명길의 대사)

 

귀국은 명의 조칙을 받아 오지 않았는가. 皇이 바뀌면 조가 바뀌는 것이다. 여름에 겨울옷을 입는가?(청나라 용골대 장군의 대사)

 

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言]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최명길의 대사).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최명길의 대사).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김상헌의 대사).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인조 임금 의 대사).

 

상헌은 과연 伯夷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합니다(최명길의 대사).

 

出城이든 守城이든 결코 다른 길이 될 수 없던 남한산성의 상황,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김훈의 냉정한 문체로 음미해보시길......

 

        2007. 8. 4.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