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7. 6. 1. 21:42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었다. 소설같기도 하고 철학같기도 하여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앙트완느 로캉탱은 뚜렷한 직업 없이 18세기 기인 롤르봉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가 부빌르라는 도시에서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로캉탱은 바닷가의 조약돌을 주웠을 때 처음으로 구토를 느꼈고, 파이프나 포크를 잡는 손에서 다시금 그 구토를 느낀다. 철도원 회관에서 '머지 않아서 그대는 내가 없어 외로우리!' 라는 곡을 듣고 구토가 사라졌다. 

 

흔히 구토가 그러하듯이 이 소설에서 구토는 인간과 사물 사이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용해되지 않는 낯선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부조리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반응이 아닌가 한다.

 

그는 철도원 회관 주인 여자와 섹스를 하기도 하고, 몇 년에 찾아온 옛애인 안니를 만나기도 하나 그 뿐이다. 그는 존재의 이유를 찾지만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는 불안하고 두렵고 외롭다.

 

로캉탱이 부빌르를 떠나 파리로 향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인상 깊은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기를 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일을 과장하고, 너무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이는 나머지 줄곧 진실을 억지로 둘러대는 것과 같은 일이다.

 

구토는 나의 내부에 있지 않다. 나는 저기에서, 벽 위나 멜빵에서, 그리고 온갖 내 주위에서 그 구토를 느낀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난 것은 명백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구토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파스칼이 말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요컨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만 그것을 거의 보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어떤 부인을 보고, 그 부인이 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사람의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 둘 수는 없다.

 

우리들 사이에 있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우리가 비슷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들은 새로운 일을 옛것을 가지고 설명한다......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곤 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사람들은 멀찍이 물러서야 판단을 할 수 있고, 비교도 반성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가치를 너무 추구하지 말 것. 그것은 역사가 지긋지긋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는 모든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주고 있다.....경험은 확실히 죽음에 대한 방어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권리, 노인의 권리다.

 

명령을 한다는 것은 엘리트의 권리가 아니라 그의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그 뒤에는......아무것도 없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내부에서 존재하지 않고 그의 내부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육체는 한 번 태어나면 혼자서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은 바로 내가 지속시키고 내가 전개시킨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 그것은 나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권리니까, 나는 존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는 생각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흘 후에 나는 안니를 만날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내가 살고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 다음에는?

 

나는 걱정거리가 없다. 연금 생활하는 사람처럼 돈은 있으나, 윗사람도 없고 처자도 없다. 나는 존재한다.

 

제가 슬픈 것은 어떠한 쾌락에서 제가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 저에게는 낯설다는 점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세계는 존재한다- 그리하여 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나는 그 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구토가 생겼다.

 

보통 존재는 숨어 있다. 그것은 여기 우리들의 주위에, 그리고 우리들의 내부에 있다......그러나 결국 존재를 만질 수는 없다......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혀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나는 존재의 열쇠, 저 구토의 열쇠, 그리고 나 자신의 생활의 열쇠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내가 이어서 파악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부조리로 귀착한다. 부조리 이것 또한 말(語)이다. 나는 말과 싸운다.

 

부조리, 조약돌과의 관계, 마른 흙과의 관계, 나무와의 관계, 하늘과의 관계, 초록색 의자와의 관계, 그 모든 관계에서 부조리한 것이다.

 

나는 검정색을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본다는 것,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며 확연하게 단순화한 관념, 인간의 관념이다.

 

본질적인것, 그것은 우연이다.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 허무는 존재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서른 살인데! 나는 내가 가엾다.

 

"신이 없으면 인간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 "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사르트르의 주인공들이 거니는 거리의 주변에는 신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1936년 갈리마르 출판에서 출판을 거절당한 이 책 때문에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하였다.

 

실존주의에 관심이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2007. 6. 1.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 

(추기 : 이창동 감독 영화 '밀양'을 보고

조금 전에 영화를 보고 왔다. 이신애(전도연 분)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여의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서 아들이 유괴범(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에 의하여 살해된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준다는 교회집사의 말을 듣고 개척교회에 간다. 그곳에서 겉으로는 평온을 찾아간다.

 

성경의 말씀에 따라 신애는 살인범을 용서하러 마산교도소로 간다. 마산교도소에서 살인범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는 신애에게, 자신은 기도와 회개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고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는 말을 한다. 그 때 신애는 자신이 살인범을 용서하지 않고 있으며 평온도 찾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정신적 혼란을 겪는다.

 

교회 부흥회에 가서 '거짓말이야'이라는 노래를 틀기도 하고, 교회장로를 꾀어 섹스를 유도하기도 한다. 기도회에서 목사에게 외치기도 한다. "내가 살인범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벌써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교회장로가 야외에서 신애와 섹스를 시도하다가 하느님 때문에 발기가 안되다며 섹스를 중단한다. 신애는 섹스 내내 하늘을 향해 '잘 보세요'라며 되뇌이다가 교회장로가 섹스를 중단한 직후 구토를 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다녀온다.

 

카센터 사장 김종찬(송강호 분)은, 밀양으로 오는 도중에 고장난 신애의 차를 수리해준 인연으로 만난 이래 신애가 정신병원에 다녀올 때까지, 신애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를 돕고, 배려하고, 지켜본다.

 

신애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머리카락을 자르러 갔다가 미장원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살인범의 딸을 만난다. 신애는 그녀로부터 머리카락을 자르던 중 미장원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서 거울을 보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뒤따라온 종찬이 그 거울을 들어준다. 그 옆으로 밀양의 따스한 햇살이 땅을 비추면서 이 영화는 끝난다.

 

교회집사는 신애에게 전도를 하면서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믿느냐'고 말하지만, 교회사람들이야말로 겉으로 평온을 찾아가는 신애만 보지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는 신애를 보지 못한다. 종찬만이 신애의 슬픔과 고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쓴다.

 

신애의 구토가 어쩌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 글을 덧붙인다. 2007. 6. 2.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