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역사)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읽다.

자작나무의숲 2008. 4. 26. 19:26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읽었다. 저자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잠시 잡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입대해 종군했다. 그후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냈고, 1936년에 소르본 대학의 경제사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봉건사회'라는 중세에 관한 종합연구서를 출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53세의 저자는 자원입대해 1944년 3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중인 1940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집필되어 미완성 원고 형태로 있던 것을 학문적 동반자였던 뤼시앵 페브르와 아들인 아들인 에티엔 블로크의 수정, 보완을 거쳐 책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아들이 저자에게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역사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본래 일어난 그대로' 기술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랑케의 격언이 있지만, 저자는 견해를 달리한다.

 

마르크 블로크에게 역사가의 행위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작업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현재와 과거는 연관되어 있으므로 '현재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면 필연적으로 과거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자질'이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한 사건에 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 속의 인간들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한다. 마르크 블로크와 뤼시앵 페브르가 '아날'지를 창간함으로써 형성된 아날 학파는 정치보다는 사회, 개인보다는 집단, 연대보다는 구조를 역사 인식의 기본틀로 삼으며 전통적 역사학에 지리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문화 연구, 인류학 등을 중첩시키는 거대하고 섬세한 인식 체계를 구축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대목은 다음과 같다.

 

역사적 현상이란 그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도 더욱 많이 그들의 시대를 닮는다'

 

질문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스승인 샤를 세뇨보스) / 마르크 블로크는 반대 견해

 

젊은 시절의 괴테는 평범하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깊이 있는 말을 했다. '현재란 없다. 단지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자질이다......과거의 오래된 사료에서 인간생활의 살아 있는 느낌을 감지하려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하며, 이것은 현실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역사가가 나중에 그 방향을 다시 복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메이틀랜드가 말한 바와 같이 '거꾸로' 역사를 읽어가는 것이 오히려 유익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모든 연구는 가장 잘 알려진 사실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진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류의 모든 지식은, 시간의 어떠한 지점에 적용된다 할지라도, 그 본질의 대부분을 언제나 다른 사람의 증언 속에서 얻게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현재를 탐구하는 연구가들이 과거를 탐구하는 역사가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프랑수아 시미앙의 적절한 표현에 따르면, 과거의 인간에 관한 모든 사실과 현재의 인간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에 대한 인식은 '흔적'에 의한 인식이다.

 

본래 과거는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에 관한 인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선되며 진보될 수 있다.

 

우리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자유롭게 사용한 수없이 다양한 기록의 두 가지 주된 유형을 마주하게 된다. 첫번째 유형은 증거를 남긴 사람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고, 두번쩨 유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역사 연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두번째 유형의 증거를 점점 신뢰하게 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흔히 정신의 공정성은 경솔하게 믿지 않는다는 것과 몇 번이라도 의심할 줄 안다는 데 있다(미셀 르바소르)

 

기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밖에 그 동기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특히 허위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증거가 된다......기만은 그 성질상 또 다른 기만을 낳는다. 

 

기억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불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전혀 없다.

 

가장 친근한 사물이란 통상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기가 가장 곤란한 사물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친숙함이란 필연적으로 무관심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일치의 확인을 통해서 서로 상반되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거짓임이 드러난다.

 

학문을 하는 데에는 언제나 두 가지, 즉 현실과 인간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통시적인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 넓이가 좁고 우리의 생이 짧다는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통시적인 연구가 정당하다는 극히 소극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과거의 용어를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외견상 매우 안전한 방법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로 그것을 적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우선 사물이 변화할 때 그것과 병행된 명칭이 언제나 함께 변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회는 이른바 계층화한 2개 언어 병용주의를 시행하였다. 즉 일상 언어와 학술 언어라는 두 종류의 언어를 병존시켰다.

 

문헌에 사용된 어휘는 나름대로 하나의 증거 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분명히 그것은 매우 귀중하기는 하지만 모든 증거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비판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비록 사실이 명칭에 선행한다 하더라도 명칭의 출현은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에 대한 인식의 중요한 단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는 어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도에 의해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역사라는 큰 강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지표에 따라 가장 연속적인 운동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 정신의 본성은 운동의 연속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특수한 선행 요소 즉, 사건을 발생시키는 각종 요소 중에서 이른바 차별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선행요소를 우리는 특히 '원인'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의 원인은 가정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교에 갓 입학하여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역사란 과거를 정직하게 재현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던 나에게 '역사란 과거의 현재의 부단한 대화라는 내용'의 그 책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마르크 블로크의 이 책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내게 안겨주었다.  

 

                        2008. 4. 26.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