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성찰)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번'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7. 4. 4. 18:56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번'을 읽었다. 장영희 교수는 2차례 소개한 바 있는데,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서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영미시를 번역하고 감상을 덧붙이는 내용의 책을 펴낸 바 있다.

 

'내 생애 단 한번'이라는 책은 장교수가 월간지 '샘터'에 기고했던 에세이를 엮은 것인데, 2000년에 발간된 이래 2005년까지 23쇄를  인쇄할 정도로 꽤 읽혔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에 걸려 몇 차례에 걸쳐 수술과 치료를 받으며 고생했던 이야기, 중학교 이후로 입학할 때마다 입학 여부를 둘러싸고 학교측 인사와 옥신각신했던 이야기, Y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려고 하였으나 장애를 이유로 면접에서 거부당하고 그 길로 토플 공부를 하여 뉴욕 주립대학교로 유학간 이야기,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겪었던 이야기가 꾸밈없이 드러나 있다.

 

특히 아버지인 장형록 교수(서울대학교 사범대학)가 생전에 몸이 불편한 딸이  편안하게 차를 탈 수 있도록 어느 건물 현관 입구에 차를 댔다가 주차관리원으로부터 차를 빼라며 수차례 면박을 당하고서도 계속 허리를 굽히고 사과하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애원했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책에서 실린 글 중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 텍쥐페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진짜'가 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언젠가 먼 훗날 나의 삶이 사그라질 때 짝사랑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면 미국 소설가 잭 런던과 같이 말하리라.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고. 그 말에는 무덤덤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찬란한 섬광 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한껏 태우는 삶이 더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성숙의 결정이다'라는 키츠의 말처럼 성숙은 어차피 아픔과 죽음을 수반하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다'와 '살다'라는 동사는 어원을 좇아 올라가면 결국 같은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영어에서도 살다(live)와 사랑하다(love)는 철자 하나 차이일 뿐이다.

 

'아 나의 형제여, 나는 이제껏 너보다 아름답고, 침착하고,고귀한 고기를 본 적이 없다. 자, 나를 죽여도 좋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 이제 나는 상관없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노인과 바다 중에서)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책 제목)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력해야 한다. 하인들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어린 아이들을 내보내라. 어린 아이들에게는 건전하지 못한 경험이 될 수 있고, 이 시점에서 그들은 유용성이 떨어진다'(제레미 번담의 유언)

 

'좀더 빛을'(괴테의 유언)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네이선 헤일의 유언)

 

나폴레옹의 형수 엘리자베스 보나파르트가 죽을 때 누군가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고 말할자, 그녀는 '세금도 피할 수 없지'라고 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필적이다'(에머슨)

 

'이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일이다(주홍글씨 중에서 너새니얼 호손이 한 말)

 

이 책의 지은이는 숨기지 아니한다. 꾸미지 아니한다. 사물 너머, 아니면 사물 아래에 있는 것, 더불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려고 한다. 온갖 장애를 훌쩍 뛰어넘는다. 내 상애 단 한번 그 분처럼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면.....

 

    2007. 4. 4.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