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괄
귄터 그라스가 쓴 <양철북>을 읽었다. 작가는 1927년 폴란드 자유시 단치히에서 태어났고, 1959년 이 작품을 출간하였으며,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1952년에서 1954년에 걸쳐 정신병원에 수감된 난쟁이 오스카 마체라트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정신
병원에 수용된 오스카는 외견상 성장이 중단된 세살짜리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의 지성을 갖
추고 있다. 주로 단치히를 무대로 하여 20세기 초반과 중반의 파행적인 독일역사를 오스카라는 난쟁이 인물로 알레고리화하여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2. 발췌
그래, 사실이다. 나는 정신 병원에 수용된 환자다.
그래서 제복 차림의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 무렵 내가 진짜 아버지라고 추정하고 있던 신사복 차림의 아버지가 도착할
시간이 되면 나는 곧바로 북을 치면서 집을 나와 <5월의 초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 후 곧 나는 불쌍한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곤
했다.
그녀를 좋아했던 사람이나 가게 손님들 모두가 말하지요. <난쟁이가 북을 쳐서 그녀를 묘지로 데려갔다. 오스카 때문에 어머니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난쟁이가 어머니를 죽였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만한 크기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외적인 성장 없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의무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지요!
불쌍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모욕당한 북에 점점 더 매달렸다. 북은 어머니처럼 쉽게 죽지 않았고,
새로 구입할 수도 있었으며, 하일라트 노인이나 시계방의 라우프샤트더러 수선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북은 나를 이해했고,
언제나 바른 대답을 주었으며, 내가 북에 의지하듯 그것도 나에게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식료품은 법률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의 절도라고 생각하고 잠자코 받았다. 하지만 목도리는 사치를, 사치는 경솔을,
경솔은 감옥을 의미했다. 트루친스키 아주머니의 생각은 단순하면서도 옳았다.
그리고 끝이 났을 때, 그들은 재빨리 희망에 찬 하나의 시작을 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끝은 언제나 시작이며 또한 모든
결정적인 끝에서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씌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희망에 찬 끝맺음과 함께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스페 묘지에서 마체라트를 묻고 있었을 때 내 뒤통수에 돌이 명중한 다음부터 비로소 나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 살의 나이에 오스카 마제라트는 지하실 계단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추락 때문에 그의 성장은 멈추었다. 그리고......
여하튼 우리는 진짜 폴란드인도 아니고 진짜 독일인도 아니야. 카슈바이인은 독일인도 폴란드인도 되지 못하는 거야.
묘지에서야 비로소 인생은 윤곽을 얻는다. 물론 무덤 주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원하는 자에게 인생은 의미를 내린다는 말이다.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북은 아니었다. 대용품에 불과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행복의 대용품도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어쩌면 행복은 대용품으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오스카의 북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클레프까지도 부활했던 것이다.
3. 소감
여기서 양철북이 상징하는 바가 뭘까? 그냥 느낌으로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오스카는 난쟁이로 성장은 멈추었지만, 역사를 경험하면서 나이를 먹으면서 양철북 연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클레프도 부활시키지 않았나. 양파 주점에서 한 연주는 어떻고.
2016. 8. 15.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