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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3. 2. 20. 22:00

1. 개괄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저자는 예일대학교 교양철학 교수다. 이 책은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발췌

육체 없이 정신만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면, 나의 육쳬와 정신은 이론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단순함이란 하위 구성물로 이뤄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를 의미하는 형이상학 용어다. 반면 조합물에 대해서는 그 구성요소들을 해체한 상태, 즉 소멸된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존재는해체하는 방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해체할 수 있는 구성요소들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근거를 제시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아들의 책에 있는 사진과 그림을 반박하는 것이다.

 

육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은 동일한 육체다. 그러나 육체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중요하지는 않다. 육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뇌다...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뇌는 인격을 관장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 시선으로 더 많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죽음이라는 개념에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휴가를 즐기고 음악을 들을 수는 있지만, 함께 죽지는 못한다. 우리 모두 홀로 죽어야 할 운명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 때문이다.

 

살아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설명은 오늘날 박탈이론이라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영겁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겁의 세월이 있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죽은 이후에 무한한 비존재의 상태가 이어진다고 해서 우울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결론 내리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스위프트는 영생을 끔찍한 형벌로 묘사하고 있다. 영생이 정녕 이런 것이라면 죽음이 오히려 축복일 것이다. 몽테뉴 역시 노년의 살을 힘들게 만드는 고통과 괴로움과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죽음을 축복이라고 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스피노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과 상호작용해 삶을 더 위태롭고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삶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카프카)

 

살아서 거룩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 영혼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 성스러움이 충만하면

시는 결실을 맺으리라....

적어도 한번은

신들처럼 살아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나이다(프리드리히 휠덜린).

 

삶이라고 하는 선물에 적절한 감사의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다.

 

나는 사람이다. 무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를 죽이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3. 소감

어쩌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명제를 철학으로 접근하니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꽤 유용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2013. 2. 20.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