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다.

자작나무의숲 2008. 8. 24. 19:57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었다. 저자는 고려대학교에서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구공간 수유 + 너머'를 창립한 바 있다. 이 블로그에서도 '공부의 즐거움'을 읽고 작성한 독서일기에서 그녀를 소개한 바 있다. 특히 그녀의 일갈 '공부에 외부란 없다. 공부는 원초적 본능이자 삶의 모든 과정이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두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고.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에 모골이 송연했던 기억이 새롭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고 세 번 놀랐다. 첫째, 이렇게 경쾌하게 글을 쓸 수 있구나. 둘째,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조선시대 지성사를 구획짓는 심오함이 있을 줄이야. 셋째, 박지원 선생의 삶이 참으로 멋있구나.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열하일기를 뛰어난 기행문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서 비로소, 열하일기 속에는 정조가 나서서 문체의 반정을 시도했을 정도로 혁명적인 문체의 변화가 있었고(고문주의에서 소품체로), 오랑캐 나라로 비웃던 청나라가 실상은 소중화주의에 빠져 있던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 있었으며, 18세기 조선을 겉도는 박지원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책 속에는 우울중을 앓았던 청년 박지원, 과거 시험에 붙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든 선비 박지원, 벗을 아내보다 더 좋아했던 인간 박지원의 생이 적나라게 드러나 있다. 조선지성사에 빛나는 박지원과 정약용을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한 저자의 분석도 새롭다. 박지원 선생의 일정을 좇아 2003년 봄 중국을 다녀와 그 느낌을 책 곳곳에 심어 놓는 저자의 열정과 언표 배치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시를 멀리한 이유는 꽤나 단순하다. "그 형식적 구속 때문에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명말 양명좌파의 기수 이탁오)

 

북벌이라는 견고한 요새에 균열을 일으키고, 북학으로 방향을 선회하도록 이끈 것은 바로 연암그룹에 의한 연행록 시리즈였다.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굴 닮았나?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보았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네

 

문체야말로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가장 첨단의 기제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체는 지배적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이기도 하다......삶 자체가 그대로 글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스타일, 그것이 바로 소품체다. 

 

"利用이 있은  연후에야 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후에야 正德이 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식의 출발이자 토대였던 것이다. 그런 연암의 눈에 가장 눈부시게 다가온 것은 화려한 궁성이나 호화찬란한 기념비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일상을 끌어가는 벽돌과 수레, 가마 등이었다.

 

그의 유머 능력은 호질에서 특히 돋보인다. 그는 상점의 벽 위에 한편의 기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베끼기 시작한다......"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거요."

 

웃음이란 기본적으로 자아와 외부가 부딪히는 경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청문명의 핵심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말똥구리와 여룡의 비유가 그러하듯이 코끼리와 범, 쥐 사이에는 위계를 설정할 수 없다. 각자 다른 종류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 있다."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쎄.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은 마치 이 물이 언덕에 제(際)함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곧 그 '사이'에 있는 것이네"(도강록)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 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의 미학적 특질이 유머와 패러독스라면, 다산은 비장미를 특장으로 한다.

 

연암이 友道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 비해, 다산은 孝悌를 일관되게 주창한다.

 

일독을 권한다. 한참 웃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2008. 8. 24.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