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암송

최영미의 '선운사에서'

자작나무의숲 2007. 3. 7. 21:12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위의 시에서 떨어진 꽃이 동백꽃이려나?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실린 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란 시가 처음 발표된 1994년 그 때만 해도

이 시를 가리켜 청산주의라는둥, 운동을 상품화했다는둥 비판이 많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를 분수령으로 하여 변혁운동이 주체면에서 내용면에서 크게 변화된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때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007. 3. 7. 부산에서 자작나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