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위의 시에서 떨어진 꽃이 동백꽃이려나?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실린 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란 시가 처음 발표된 1994년 그 때만 해도
이 시를 가리켜 청산주의라는둥, 운동을 상품화했다는둥 비판이 많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를 분수령으로 하여 변혁운동이 주체면에서 내용면에서 크게 변화된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때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007. 3. 7. 부산에서 자작나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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