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단상

문학 속의 재판

자작나무의숲 2015. 12. 2. 08:30

1. 문학 속의 재판

나는 문학 책을 자주 읽는다. 고염무의 讀書萬卷 行萬里路가 내 꿈이기 때문이다. 문학 속의 재판장면은 재미있다. 더욱이 내가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홀가분한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판사들이 가장 많이 읽은, 문학 속의 재판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식기를 훔치다가 발각되어 달려온 헌병에게 연행되려는 찰나 '이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안 가져 갔소'라면서 그를 구해준 주교의 온정에 눈을 뜬 장발장은 평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참인간으로 태어나려고 노력한다. 몽뢰이유 쉬르 메르에서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추고 공장을 경영하여 시민들의 신망을 얻어 시장으로까지 선출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장발장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것을 알고 그는 명성과 부를 내던지고 자수한다.

이 사건에서 주교가 없었다면 사건처리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전과가 많았던 장발장은 아마도 중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고 출소 후에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또 재범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재판장면을 문학 속에 배치한 작가로는 토스토예프스키를 빼놓을 수 없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은 죄로 기소되었고, 자수했다는 점과 다른 정상이 참작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는다. 이 책을 읽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형법(2010. 4. 15. 개정 전)은 강도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살인 또는 무기징역형에 처하게 되어 있고, 자수하여 형을 감경할 때는 무기징역형일 경우 7년 이상을 선고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았더라도 징역 8년을 선고받을 수 있고 소설을 읽어 본 독자로서 징역 8년이 적정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토스토예프스키의 양형 감각에 놀란 적이 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매춘부 출신의 애인 소냐로 하여금 옥바라지를 하게 하고, 소냐의 사랑에 감동받은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그녀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소냐로부터 받은 성경을 머리맡에 놓아 두게 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죠프의 형제들>에서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피살되고 3,000루블이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범인으로 아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애칭 미차)가 기소된다. 소설을 2/3까지 읽을 때까지 나는 미차를 진범으로 생각한다. 스메르자코프가 독자인 나까지 속여가며 치밀한 계획하에 범죄를 저지르고 함정을 파서 죄를 미차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검사의 논고, 변호인의 변론은 법률가들이라면 정독해볼 가치가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이와 같이 소설 속의 재판장면이 실감나는 것은 토스토예프스키 본인이 사회주의 단체를 결성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집행 직전에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을 간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재판장면은 톨스토이에도 빠지지 않는다. <부활>에서 귀족 네흘류도프에게 버림받은 카튜사는 하녀를 전전하다가 유곽에서 창녀생활을 7년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단골손님의 돈과 반지를 훔치고 독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 우연히 네흘류도프가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배심원들이 토론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평결을 하게 되지만, 답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절도죄에 대하여는 '객관적 사실은 인정되나 절취할 의도는 갖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재한 반면, 살인죄에 대하여는 ‘단 살해할 의도는 없었음' 이라는 부분을 빠뜨린다. 재판장은 답신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시정하려고 시도하나, 배석판사 중 1인이 반대하고 자신의 애인과 약속한 시간에 맞추려고 답신서를 그대로 채택하여 캬튜샤에게 살인죄를 인정하고 징역 4년을 선고한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네흘류도프는 영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거나 싼 값에 빌려주고, 카튜샤를 따라 시베리아로 향하면서 황제에게 청원을 한다, 카튜사는 청원이 받아들여져 시베리아 유형에서 벗어나고 감옥에서 만난 정치범의 도움으로 부활하게 되고 오래된 네흘류도프의 청혼을 거절하는데, 네흘류도프도 그 과정을 거치면서 부활한다.

 

재판장면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등장한다.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의 구혼자금을 마련해주기 위해 유대인 상인 샤일록과 人肉契約을 맺게 된다. 빚을 못 갚으면 샤일록이 원하는 부위 살 정량 1파운드를 잘라 내 준다는 내용이다. 안토니오는 사업용 배가 좌초되어 빚을 제때에 못 갚게 되고 샤일록은 안토니오를 법정에 세운다. 바사니오의 구혼을 받은 포셔는 서둘러 결혼을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재판을 주재하는 공작의 위임을 받아 재판에 관여하게 된다. 포셔는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도려 내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살도 정확하게 1파운드를 떼어내야 하고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외국인이 직접 또는 간접적인 시도하에 시민의 생명을 노렸음이 입증되었다며 샤일록의 재산 전부를 몰수’하는 판결을 함으로써 안토니오를 살려낸다.

 

2.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하고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주린 배를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김훈의 ‘흑산’ 중에서)을 읽고 나면 가난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재판 당일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하자 우리 피고인은 그냥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했고, 그 책 중의 한 쪽을 읽어주었다. 그 때 읽어준 시가 알프레드 디 수자의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10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이렇게 10번 하면 본인은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은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피고인에게 그런 말을 하며 책을 선물했는데, 그 책이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였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3. 감동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모두 모습이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

 

                  문학사상 2015년 11월호에 기고 

'생활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라하의 48시간  (0) 2014.09.02
이임사  (0) 2014.04.11
영화 소원을 보고  (0) 2013.10.03
공무원생활을 시작할 때 유의할 점  (0) 2013.07.16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고  (0) 201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