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단상

프라하의 48시간

자작나무의숲 2014. 9. 2. 21:49

1. 도난

스위스 바젤에 있는 민사지방법원, 고등법원 방문을 마치고 취리히로 이동하여 비행기를 타고 체코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한식당에서 오랫만에 삼겹살을 먹고 소주도 한 잔하였다. 건배사도 멋있게 하였다. 기분 좋게 회식을 마치고 잠시 풀어 놓았던 쌕을 찾으니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거짓말 같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조금 전에 외국인으로 보이는 2명이 식당을 들어 왔다가 그대로 나갔다고 한다. 도난이다. 황당하였다.

쌕 속엔 우선 여권이 있었고, 지갑도 있었고, 내가 아끼는 넥타이, 썬글라스까지 있다. 연이어 아내가 떠올랐다. 외국 간다고 쌕을 사주면서 꼭 가슴에 메고 다니라고 하였는데, 지청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답답하였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카드사에 국제전화를 하여 사용정지를 시키고, 일행의 위로를 건성으로 들으며 프라하 구 시가지를 걸어 숙소에 도착하였다.

 

2.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우선 여권은 양복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프라하 공항에 내려 한식당으로 걸어 가면서 불편하다고 쌕에 넣은 것이 떠올랐다. 그냥 양복 호주머니에 넣어두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테...

둘째 지갑 속에는 한국 돈만 들어 있었는데, 왜 그 지갑을 쌕에 넣고 다녔을까? 어차피 한국돈은 못 쓰는 것이니  트렁크에 넣어두면 될 것을 왜 쌕에 넣었을까? 한식당에 가기 전까지는 양복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뭐한다고 빼서  쌕에 넣었을까? 그리고 유로화는 왜 또 종이봉투에 넣고 다녔을까? 유로화를 지갑에 넣은 다음 지갑을 양복 호주머니에 넣고 한국돈은 종이봉투에 넣어 트렁크에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셋째 넥타이는 프라하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매고 있었는데, 답답하다는 이유로 푼 것이 화근이었다. 배석판사가 5년 전에 선물한 것으로서 중요한 행사 때만 메는 것인데, 썬글라스는 어쩐다..

여권을 재발급받으러 프라하 경찰서와 한국대사관에 가야하는 것 때문에 일정 일부를 생략해야 할 텐데...이런 저런 걱정에 뒤척이다가 해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3. 낮

도난 다음날 도난을 잊고 일정에 충실하려고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 오전에 프라하 법원센터를 방문하고 오후에 프라하에 있는 외국인 경찰서를 갔다.

철문에 설치된 인터폰을 통해 한참 대화를 한 다음에야 문이 열렸다. 불을 켜지 않아 약간 어두운 공간에서 경찰서 직원은 동행한 가이드 말을 듣더니 범죄피해 리포트를 써 줄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의 답변은 이러 했다. 같이 간 가이드는 도난의 증인이 아니 었고, 나는 체코말을 할 수 없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그외 도난의 증거가 없으니 여권분실신고만 받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이드와 경찰서 직원이 언쟁을 벌이기에 참다 못해 내가 나서서 짧은 영어로 그 직원에게 항의하였다. 식사를 하기 위해 쌕을 풀어 의자 뒤에 두었고 회식이 끝나고 나니 가방이 없어졌다. 그 사실을 식당 주인도 알고 있다. 최소한 식당 주인이라도 조사를 해봐야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이런 뜻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영어는 다르게 표현되었다.

경찰서 직원의 답변은 쌕을 풀어 의자 뒤에 둔 것은 분실로 볼 여지가 크다는 것이었다.

한국대사관에 가야 할 시간도 다가 오는데 보험금청구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에 경찰서 직원이 교체되었다. 이 직원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 되도록이면 나의 말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들어주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논쟁이 길어지자 가이드가 한국 대사관에 하소연하였고, 대사관 직원이 경찰서에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보험금을 부정하게 수령하기 위하여 범죄피해 리포트를 허위로 발급받는 사례가 많아 프라하 경찰서에서는 엄격한 증명을 요청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2시간 정도 걸려 범죄피해 리포트를 만들고 근처 사진관에서 즉석 사진을 찍어 오후 5시 무렵에 한국대사관에 도착하여 단수여권을 재발급받았다.

체코 관공서는 아침 7시 반에 시작하고 오후 4시 반에 끝나는 경우가 많아 아슬아슬하게 일을 마친 셈이었다.

 

4. 밤

그날 밤 나는 비싼 경비를 들여 간 체코여행이 헛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교훈을 끌어냈다. (1) 원칙을 단순하게 정하자 (2) 원칙을 정했다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대로 밀고 가자 (3) 돌이킬 수 없다면 받아들여라

그리고 나는 경험했다. 자신의 억울한 상활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큰 고통이라는 것을, 공무원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매우 답답하고 때로는 화가 난다는 것을.

그렇게 프라하의 48시간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3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남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가?

 

      2014. 9. 2. 창원에서 자작나무

'생활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 속의 재판  (0) 2015.12.02
이임사  (0) 2014.04.11
영화 소원을 보고  (0) 2013.10.03
공무원생활을 시작할 때 유의할 점  (0) 2013.07.16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고  (0) 2013.01.26